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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관촉사 답사기
글쓴이: 최성호
조    회: 8,359  
작성일: 2004-03-02 16:40
 
근 십여 년만에 은진미륵을 찾았다. 은진미륵이라는 이름은 내가 어렸을 때 불렸던 이름이다. 원래의 명칭은 관촉사 석조보살입상(보물 218호)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높이는 18.2m이고 사기(寺記)로나 인상(印相)으로 보아 관음보살임이 분명하다. 불신은 허리를 중심으로 두 개의 돌을 이어 만들어졌는데, 머리부분 만 거대하고 전체적인 비례나 균형이 맞지 않아 괴이한 느낌을 준다. 머리 위에는 높은 원통형 관을 쓰고 그 위에 사각형의 보개를 이주으로 올려놓았는데, 관의 윗부분은 8각형으로 다듬어 보개 밑부분의 팔각홈과 맞추었다. 그리고 팔각홈 주위에는 단판연화문을 조각하고, 네 모퉁이에는 금속령(금속령)을 달았다. 그 위의 보개는 훨씬 작은 것으로 밑에는 연판 4엽이 조각되어 있으며, 위에는 보주가 올려져있다.  원통형 관에는 3척 정도의 금동불입상이 있었으나 한말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 토속적인 얼굴모습, 도식적이며 비사실적인 조각수법 등은 보물 제 217호인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이나 보물 제 219호인 개태사지석불입상 등 고려 초기 충청도지방에서 유행하였던 불상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백호를 수리할 때 발견된 묵기에 ‘정덕 16년(968년) 신사 4월 15일’이라고 적혀있어 조각시기와 관련하여 참고가 된다. 민족대백과사전의 관촉사사적에 의하면 ‘ 958년(광종 9년) 여인이 동자의 소리를 듣고 찾아보니 큰돌이 솟아올라 나오면서 소리를 내었다. 이를 왕에게 보고하여 왕명에 의해 이 돌로 불상을 건조하기 시작하여, 혜명(慧明)이 37년에 걸쳐 불상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묵서명에 968년에 완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37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는 그리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사실 이러한 규모의 불상을 만드는데 37년이나 걸렸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10여 년 정도가 걸렸다는 것이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4(충남)에는 ‘ ..... 조정에서 “이것은 큰부처를 조성하라는 길조”라고 하며 금강산에 있는 해명대사를 불러 부처의 조성을 명하였다. 이에 석공 100명을 거느리고 불사를 하던 해명은 솟아 나온 바위로 허리 아랫부분을 만들고 가슴과 머리부분은 그곳에서 12km떨어진 연산면 고정리 우두촌에 있는 바위로 만들어 일꾼 1000명을 동원하여 옮겨왔다고 한다. 바위가 하도 커서 머리를 올릴 재간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냇가에서 아이들이 부처를 모신다며 아랫부분을 모래로 쌓아올려 놓고 윗부분을 올려놓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부처를 세울 수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몇 가지 우리는 상상하여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첫 번째는 이 불사가 국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공사방법을 유추하여 볼 수 있다. 사실 이만한 규모의 불상을 조성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00명의 석공과 1000명의 인원을 동원한다는 것이 일개 지방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국가에서 지원하였다는 것의 증거는 보살입상을 만든 솜씨가 결코 지방의 장인의 수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우선 돌을 보면 매우 치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돌의 강도가 매우 높아서 쉽게 다룰 수 없는 돌이다. 돌의 입자가 치밀하고 강도가 높기 때문에 현재에도 선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돌은 쉽게 다룰 수 있는 돌이 아니라는 점에서 석공의 능력을 가늠하여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부드러운 선의 표현은 웬만한 수준의 석공으로는 할 수 없는 솜씨이다. 석공의 우수한 솜씨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옷 주름의 표현, 손의 표현, 화관에 있는 물끊기와 연꽃의 등을 조각한 솜씨는 다른 어느 석불에 견주어도 떨어지는 솜씨가 아니다. 특히 귓부리를 보면 돌을 도넛처럼 관통하여 만들었다. 이러한 것은 돌에 이해와 장인의 자존심을 걸고 하는 인내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고도의 작업이다. 집으로 돌아와 찍은 프로젝트로 확대된 슬라이드 필름을 보면서 나는 이 불상이 결코 지방양식 또는 개념이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망원렌즈로 찍은 부분사진을 보면서 내내 불상을 만든 장인의 솜씨에 감탄하였다. 눈을 보면 눈꼬리를 살리기 위하여 눈꼬리 부분에 검은색을 조금 칠하여 놓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색칠한 부분을 약간 도드라지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턱 아래 부분에 돌의 재질이 변하는 부분이 선형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변화선이 귓바퀴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변화부분은 귓바퀴의 아래 투각한 부분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이렇게 재질이 변화하는 부분은 쉽게 부러지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이 불상에서는 투각한 곳이 재질이 변화하는 부분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장인이 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한다는 점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얼굴 상부에 있는 머리카락 처리나 귀부분의 곡선의 처리를 보면 단순한 부조가 아님을 보았다. 음영을 강조하기 위하여 안으로 올려 파서 조각하였다. 이러한 정성이 있었기 때문에 선이 명확하게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입술의 선을 보면 입술 끝을 날카롭게 처리하기 않고 부드럽게 처리하여 경직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보살입상의 아랫부분의 바위를 보면 물처리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뒤의 절벽과 입상사이의 바닥 돌에 2중으로 배수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는 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노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보아 관촉사의 불상은 결코 지방양식일 수도 없고 그저 크게만 보이려고 만든 불상이 아니다. 깊은 배려와 그에 부수되는 고도의 솜씨가 어우러진 걸작이다. 이 불상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미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 불상의 조성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여보자 윗부분의 돌은 멀리서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어느 곳의 돌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돌의 성분을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돌의 석질을 보면 주변의 돌과 다름을 알 수 있다. 관음전 앞 통문 옆에는 무엇인가를 세워놓았던 것 같은 돌이 있다. 이 돌에 무엇을 세워 놓았던 촉의 흔적과 물 처리 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각물이 서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 돌과 보살입상의 돌을 비교하여 보면 석질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석불입상을 만든 돌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돌을 현재의 위치로 어떻게 운반하였을까. 돌의 무게는 2.7ton/㎥이다. 따라서 몸통을 이루고 있는 돌의 무게는 적어도 60톤은 될 것이다. 이러한 돌을 옮겨오기 위해서는 채석장에서부터 이곳까지 도로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일부 구간에서는 도로의 조성, 다리의 가설 등과 같은 토목공사가 수반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은 국가의 배려가 없이는 안돼는 작업이다. 도로에서 지금의 위치로의 이동은 아마도 예전의 길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새로 만든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 누문을 통해 절로 들어가지만 예전에는 지금 스님들이 차를 타고 올라가는 요사 쪽의 길을 따라 올라와서 보살상의 뒷부분을 보며 올라갔다. 아마도 이 길이 예전의 작업로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다음으로 이것을 어떻게 조립하였는가에 대하여는 내려오는 전설이 맞을 것 같다. 지금 불상의 앞의 공간은 매우 넓다.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기에 충분한 거리이다. 모래 등으로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어 돌을 밀고 올라갔을 가능성이 높다. 판축 기법으로 돌의 무게를 이길 만한 경사로를 만드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도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상의 조성은 어디서 하였을까. 돌을 채취하는 현장에서 조각이 되었을까 아니면 관촉사 현장에서 되었을까. 아마도 돌을 채취하는 현장에서 만들어져 이곳까지 운반하여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돌의 원석을 가져와 관촉사에서 가공하려면 지금의 몇 배의 크기를 가진 돌이 필요하다. 이렇게 될 경우 운반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가공하여 운반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이러한 예는 서양건축사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에 쓰인 석조물도 운반비를 줄이기 위하여 현장에서 가공하여 운반하였다. 어쨌든 이 불상을 어떻게 조성하였을까하는 몇 가지의 문제점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불상의 조형성에 관한 문제점이다. 문화재청의 자료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충청도(忠淸道) 지방에 유행(流行)하던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지방적(地方的) 불상양식을 대변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석조보살상이다. 머리에는 원통형(圓筒形)의 높은 관을 씌웠고 그 위에는 갓 모양의 네모난 보개(寶蓋)가 표현되었는데 네 귀에 이색적으로 풍령(風鈴)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해 어색하게 큰 얼굴은 토속적(土俗的)인 느낌을 주고 있고, 법의(法衣)에 표현된 음각선(陰刻線) 옷주름은 간략화되었다. 신체의 조형성(造形性)은 훨씬 감소되어 전체적으로 방형(方形)의 기둥 형태를 이루고 있어,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토착성이 강한 지방색을 나타내는 불상은 특히 고려시대에 충청(忠淸)․경기(京畿) 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그 나름대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어서 크게 주목된다. 이 보살상은 도상형식(圖像形式)과 기록에 의하여 자비의 보살로 널리 사랑받던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이 불상이 지방양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 대하여는 의문이 많이 간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선 솜씨가 결코 수준이 낮은 지방의 장인으로 보기에는 힘들다는 점에서 국가에서 파견한 장인이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단지 비사실적인 수법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이것도 강조의 의미와 불상전체의 규모에서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한 표현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크다는 것은 강조의 의미이다. 상호가 큰 것은 중요한 모습을 강조하는 수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크게 그린다. 이러한 것은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색상으로 또는 크기로 강조한다. 부처의 모습에서 중요한 것은 얼굴과 손의 수인이다. 이러한 점을 이해한다면 얼굴과 손이 강조된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지일 뿐이다. 머리 부분이 교체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불상을 조성한 석공은 천재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머리 부분의 처리를 보면 매우 거칠게 다듬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얼굴이나 몸통부분에 비하여 머리의 부분은 매우 거칠게 다듬어졌다. 정자국이 그대로 살아있는 처리는 몸통의 섬세함에 대조를 보여주면서 섬세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만일 머리 부분까지 섬세하게 다듬었다면 이러한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최근에 조성된 대불과 비교하여 보자. 최근에 만든 불상 중에서 큰 것은 법주사 대불과 양양의 낙산사의 해수관음이다. 크기로만 이야기한다면 앞서 말한 두 불상이 관촉사의 불상보다 더 클 것이다. 그러나 관촉사의 불상에서는 앞서 말한 두 불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힘의 표현에 주목하여야 한다. 만일 이곳에 나긋나긋하게 조각된 보살입상이 있었다면 어떠하였을까. 우리에게 그리 강한 인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관촉사 앞에 있는 석등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석등도 일관성을 가지고 있어 강한 힘이 느껴진다. 다음으로 이 관촉사의 불상을 주변의 양식과 비교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의 불상들의 만들어진 순서를 보면 개태사불상이 먼저이고 다음에 이 관촉사보살입상이고 다음이 부여의 대조사 불상이다. 일부는 홍성의 상하리 불상과의 연관시키고 있지만 조금 무리인 듯하다. 개태사의 조성은 국가에서 주도하였다. 개태사 석불은 국가에서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태사의 불상도 우리 눈에 익숙한 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선 돌이 그리 치밀하지 않아 불상의 조각이 치밀하지는 않다. 그러나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불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의 표현이다. 또한 개태사 불상도 선이 굵은 디자인으로 힘을 보여주고 있다. 대조사의 불상은 분명 선이 약하고 표현이 치졸하다. 따라서 이 대조사의 불상은 관촉사의  불상이 조성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따라서 관촉사보살입상이 이 지방의 양식을 대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새로운 시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단지 이러한 시도가 널리 퍼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지방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낸 것으로 끝난 것일 뿐이다. 나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여러 석조물 중에서 고려 광종 때의 석조물에 주목한다. 광종 때 또는 광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석조물은 고달사지 원종대사부도, 고달사지 원종대사 부도비, 관촉사 불상, 관촉사 석등 그리고 법인국사부도 및 부도비가 있다. 여기서 법인국사부도 및 부도비는 광종의 명으로 시작되었지만 명종 3년에 완성된 것이다. 우선 법인국사 부도와 고달사지 부도가 어떠한 계열의 장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는가에 대하여는 논의할 필요가 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부도비는 975년에 만들어 세웠고 법인국사 탄문은 같은 해에 입적하여 광종의 명에 의하여 국가에서 장인을 파견하기로 하였다.(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이지관) 그러므로 원종대사 부도를 만든 사람이 법인국사부도를 만들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논의함으로서 거의 동시대에 만들어진 두 부도의 상관관계를 알 수 있게 된다. 우선 명확히 소유주를 확인할 수 있는 원종대사부도비와 법인국사 부도 및 부도비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두 석조물에서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만큼 이 두 석조물의 조각의 기법이나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차이는 두 조형물이 서로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예술가들은 자신의 스타일을 버리지 못한다.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자신의 고유의 색깔을 유지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개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은 시대에 성격이 다른 조형물이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인국사비와 원종대사부도비를 보면 두 개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두 비는 완전히 다른 성향을 가지는 계열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인국사부도나 부도비를 원종대사비와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고달사지의 석조물을 관촉사의 것과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관촉사 불상과 원종대사부도비를 보면 시대적으로 관촉사불상(968년:묵서명기준)이 먼저이고 관촉사의 불상과 원종대사의 부도비는 강한 힘을 보이고 있다는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관촉사의 불상과 석등을 보면 부조화의 강조 및 선의 단순화를 통하여 강한 힘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원종대사 부도비(975년)는 이와는 달리 원숙한 조형성과 힘의 조화가 보인다. 즉 원종대사부도비가 한 단계 상승한 기량을 보이고 있다.   두 석조물의 완성년도에는 8년의 차이를 보인다. 시작의 시간으로 보면 원종대사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가 입적한 해(958년)에 국공을 파견해서 부도를 만들도록 한다. 이후 17년 후에 원종대사비가 세워진다. 관촉사의 불상도 같은 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따라서 두 석조물을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원종대사의 것이 나중에 만들어졌을까. 크기나 규모로 보아 원종대사의 것이 17년이나 시간이 걸릴 이유가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같은 사람이 두 석조물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관촉사의 불상을 만드는 것이 먼저 만들고 나서 나중에 원종대사의 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원종대사의 것이 늦어진 것은 아닌가 추측해본다. 그렇기 때문에 원종대사부도비가 한 단계 높아진 조형성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을 전제로 두 석조물을 만든 사람이 같은 사람이었다면 그는 힘을 강조하는 성향이었을 것이다. 이 관촉사의 불상과 원종대사부도비의 관계를 보면 고달사지의 부도가 광종연간에 만들어진 원종대사의 부도일 것이라는 확신이 강해진다. 현재 원종대사부도라고 불리고 있는 것은 결코 앞에서 설명한 상황에 맞지 않는다. 강한 원종대사부도비와 비교할 때 있을 수 없는 관계이다. 관촉사석불입상 앞에 부석사 석등이 있다고 생각하여 본다면 그것은 서로가 어울릴 수 없다. 관촉사석불 앞에는 현재의 석등이 어울린다. 이러한 관계가 고달사지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게시물은 가고파님에 의해 2004-04-01 15:41:12 여행이야기(으)로 부터 복사됨]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07-04-22 17:02:06 답사여행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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